私は勇敢に戦い、走るべき道のりを走り終え、信仰を守り通しました。 
今からは、義の栄冠が私のために用意されているだけです。
正しい審判者である主が、それを私に授けてくださるのです。 
私だけなく、主の現れを慕っている者には、だれにでも授けてくださるのです。 
テモテへの手紙第二4章7節〜8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디모데후서 4:7-8

故 권신찬 목사 (1923-1996)

보통학교 시절 (첫 줄 오른쪽에서 첫 번째)
보통학교 시절 (첫 줄 오른쪽에서 첫 번째)
1923年慶北永徳郡生まれ 
牧師を夢見ていた少年

私の家は礼拝堂の隣に建っていました。そんなこともあり、教会にお客様が来ると、いつも私たちの家に来ました。部屋が二つだけで、お客さんが来ると、父とお客は出居で寝て、残りの家族は一部屋に集まって寝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私の両親は、私が世に生まれる、ずっと前から長老教徒として信仰活をしました。私は両親に従って一生懸命日曜学校にかよいました。聖書の暗唱大会やその他、日曜学校の学生がもらえるすべての賞は、ほぼすべてもらうほど熱心だった。 


ある日、父のとなりで寝るので、寝る前に、「あなたは成長して牧師になるべきだ」と言われました。その一度の言葉が、私の生涯の目標となり、そのみことばを心に秘めることになった。

1923년 경북 영덕군 출생
목사를 꿈꾸던 소년

우리 집은 예배당 옆에 있었다. 그런 탓인지 교회 손님이 오면 항상 우리 집으로 왔다. 방이 두 칸뿐이니 손님이 오면 아버지와 손님이 사랑방에서 주무시고 나머지 가족은 한 방에 모여서 자야만 했다. 


나의 부모님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오래전부터 장로교인으로 믿은 생활을 하셨다. 나는 부모님을 따라서 열심히 주일학교에 다녔다. 성경 암송대회나 그 외에 주일학교 학생이 탈 수 있는 모든 상은 거의 다 탈 정도로 열심이었다.


한 번은 아버지 옆에서 잠을 자는데 잠들기 전에, "너는 자라서 목사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을 하셨다. 그 한 번의 말씀이 나의 생애의 목표가 되었고 그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게 되었다.

神学校の生活に幻滅を感じた 

笑ってはすまされないことが寮で起こった。新学生同士が台所で激しく喧嘩をした。 理由は、ご飯の量が少なすぎで、早く自分のご飯を食べて炊飯器にあるおこげを煮て食べるので、それを持って二人がけんかになった。 そのとき、私は少なからず衝撃を受けた。 初めに入る時は、天使たちが集まる場所と思って来ましたが、徐々に目にさわることをしばしば見ることになった。 おこげのため、そんなに青筋を立てて、敵のようにけんかをすると、どうやって出て羊飼いの生活をするかという疑惑が生じた。 


一度は教会で新たに大きな礼拝堂を建てるという広告を聞いた。 新学校の学生たちも5日間奉仕をすることにした。 主に建築資材や煉瓦(れんが)を運ぶことだった。 ところが、新学生たちの相当数が、言葉だけで奉仕するといいながら、仕事はせず、ただぐるぐる回って帰った。私は表には言わないけど、そのような学生たちを心では批判した。私は何をしても真実でなければならず、誰かがわかってくれるようがいまいが、神の前に正直でなければならないと思った。


しかし、一方では他人を判断して無視する高慢な人でした。

1950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신학교 졸업식 (뒷줄 왼쪽에서 세번째)
1950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신학교 졸업식 (뒷줄 왼쪽에서 세번째)

보통학교 시절 (첫 줄 오른쪽에서 첫 번째)

보통학교 시절 (첫 줄 오른쪽에서 첫 번째)

신학교 생활에 환멸을 느끼다

웃지 못할 일이 기숙사에서 벌어졌다. 신학생끼리 부엌에서 심하게 다투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밥 양이 너무 적으니까 빨리 자기 밥을 먹고 나서 밥솥에 있는 누룽지를 끓여다가 먹는데 그것을 가지고 두 사람이 싸움을 벌인 것이다. 그때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처음에 들어올 때는 천사들이 모인 곳으로 생각하고 왔는데 차츰 눈에 거슬리는 일을 종종 보게 되었다. 누룽지 때문에 저렇게 핏대를 올리며 원수같이 싸운대서야 어떻게 나가서 양 무리를 치는 목자의 생활을 하겠는가 하는 의아심이 생겼다.

1950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신학교 졸업식

1950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신학교 졸업식

한 번은 교회에서 새로 큰 예배당을 짓게 된다는 광고를 들었다. 신학교 학생들도 5일간 봉사를 하기로 하였다. 주로 건축 자재나 벽돌을 운반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신학생들의 상당수가 말로만 봉사한다고 하면서 일은 하지 않고 그냥 빙빙 돌다 가는 것이었다. 나는 겉으로 말은 안 해도 그런 학생들을 속으로 비판하였다. 나는 무엇을 하든지 진실해야 하고 누가 알아주건 말건 하나님 앞에 정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남을 판단하고 무시하는 교만한 사람이었다.

거듭나기 전에 시무했던 영양읍 교회

거듭나기 전에 시무했던 영양읍 교회

목회의 시작

1950년 11월, 강도사 고시에 합격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강도사 고시 중에 설교 시험이 있었는데 나는 '환도 잡은 현실 교회'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베드로가 칼을 빼어 말고의 귀를 쳤을 때에 주님이 꾸짖으시기를 환도 쓰는 자는 환도로 망한다 하셨다. 지금 현실 교회는 환도를 잡고 서로 갈라져서 싸우고 있다고 맹렬히 비난했다. 설교를 마쳤을 때 여러 목사들이 찾아와서 통쾌했다며 찬사를 보냈다. 그 후에 이곳저곳에서 부흥회를 인도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부흥 강사로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은 한 번도 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지 못했다.

나는 위선자였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리라고 작정했지만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라는 주님의 말씀에서 내가 과연 내 몸같이 이웃을 사랑하는가 반문해 보았다. 겉옷을 벗어서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에게 주었는데 나중에 옷걸이를 보니 헌 옷은 나누어주고 새 옷만 걸려 있는 것이 아닌가.


목사 꼴이 참 말이 아니었다. 나 자신은 따뜻한 방에서 잠 잘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흰쌀밥으로 배를 채우는데 거리에 노숙하며 떨고 배곯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고도 설교 강단에 서면 서로 사랑하라고 외치는 것이 얼마나 가증하고 더러운 위선인가. 결국 나는 위선자이며 삯꾼이다. 밥을 먹기 위해서이지 성령의 진리가 내 삶에 역사하기 때문에 설교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길기수 선교사와의 만남

길기수 선교사와의 만남

새로운 계기가 된 집회

대구 칠성 교회에 있을 때 길기수(Keith Glas)라는 네덜란드 선교사를 초빙하여 집회를 하게 되었다. 집회 도중에 설교자가 '여러분 거듭났습니까?'라고 크게 외쳤다. 그 순간 나는 절벽에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질문에 나는 "예"라고 답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내가 갖고 있던 믿음은 양심 속에 믿는 믿음이 아니라 지식적인 믿음이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시인하는 지식의 믿음인 것이었다.

설교 준비를 하다 거듭난 대구 칠성동 집 이층 방

설교 준비를 하다 거듭난 대구 칠성동 집 이층 방

1961년 11월 18일
드디어 진리를 발견하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로마서 3:20~21)



어느 토요일 아침,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라는 주제로 설교 준비를 하던 중 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율법을 지켜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롭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 대신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사셨는데 그 의가 바로 내 의이고, 믿음으로 예수님의 의가 내 것이 된다는 것이다. 율법에서 해방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죄를 함부로 지으면서 살아도 상관이 없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율법이 나를 구속하지 않아도 성령이 인도하시니 함부로 방종의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갑자기 마음이 평안해지고 10여 년간 양심을 짓누르던 문제가 없어지고 내가 위선자란 생각도 사라졌다.

거듭나기 전에 시무했던 영양읍 교회 (둘째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거듭나기 전에 시무했던 영양읍 교회 (둘째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牧会の始まり

1950年11月、講道師試験に合格し、牧師の按手を受けた。講道師の試験のなかに説教試験があったので、私は「はものを握る現実の教会」という題目で説教をした。 ペテロが刀を出して馬の耳を切りつけたとき、主が叱るように刃物を使う者は刃物もので滅びるとされた。 今、現実の教会は、はものを持って、互いに分かれて戦っていると猛烈に非難した。 説教を終えた時、多くの牧師が訪れて痛快だったと賛辞をおくった。 その後、あちこちで復興会を導いてほしいという要請があって、復興講師として通ったりもした。 しかし、そのようなことは、一度も私の心を満足させることが御意を得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 

침례를 받다

나는 동촌 강 서쪽에 있는 정자 밑에서 길기수 선교사에게 침례를 받았다. 그러고 나서 교회의 장로를 전원 모이라고 하고 그 앞에서 나는 참례를 받았노라고 알렸다. 그때부터 여러 가지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다. 내가 속해있던 장로교에서는 침례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일로 인하여 나는 1962년 11월 21일 대구 영락교회에서 4,500여 명의 방청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종교재판을 받게 되고 목사 직을 면직당하게 된다.

사실 그 재판은 예수님을 재판한 것이 된다. 예수님도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셨는데 예수님을 따라서 침례를 받은 것이 왜 죄가 되는 것인가? 원래 거듭나기도 전에 위선자로서 받은 목사직이니 면직된 것이 오히려 짐이라도 벗은 것같이 시원했다.

고난의 시작

수개월 후 나는 부임해있던 교회를 나왔고, 나를 따라 나온 수십 명의 신자들이 어느 식당 2층에 장소를 마련해서 내게 계속 설교해 줄 것을 요청했다. 나는 "이제부터 월급은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래도 신자 중에는 쌀도 가져오고 돈도 가져오는 일들이 있었다. 그러나 가난해서 생활이 되지 않았다.


어떤 때는 아침에 쌀이 없어 밥을 짓지 못하고 집 안에 있는 신문이나 종이들을 모아 팔아서 두부를 두 모 사서 아이들을 먹여 겨우 학교에 보내고 부부는 하루 종일 먹지 못한 때도 있었다.

평일에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주일에는 설교하고 쉬는 날 없이 일하였다. 여름철 삼복더위에 바람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일을 했는데 온몸에 땀띠가 나고 때로는 먹지 못한 채 일을 하곤 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육체적으로 그만큼 고생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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私は偽善者だった。

私は神のことばのとおりに生きると決めましたが、「あなたの隣人をあなたの体のように愛し合いなさい」という主の言葉で、私が果たして私の体のように隣人を愛しているか、反問してみた。 外着を脱いで寒さに震えている人に与えたが、後でハンガーを見たら古着は分けあげて、新しい服だけかけているのではないか。 


牧師の姿が、本当にひどいありさまだった。 自分自身は暖かい部屋でよく寝て、朝起きたら白米でお腹をいっぱいにするのに、道のホームレスは震えて腹をすかしている人々がどれほど多いのか。 それにもかかわらず、説教講壇に立つと、お互いを愛し合いなさいと叫ぶのがどれほど憎らしく、汚い偽善なのか。 結局、私は偽善者であり、賃労働者です。 ご飯を食べるためであり、聖霊の真理が私の人生に働くため説教するものではなかったのです。 

新しいきっかけとなった集会

大邱七星教会にいるとき、ギルギス(Keith Glas)という、オランダの宣教師を招待して集会をするようになった。 集会の途中で説教者が「皆さん生まれ変わりましたか?」と大きく叫んだ。 その瞬間、私は崖から落ちるような感じでした。 その質問に私は「はい」と答え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からだ。 


それまで、私が持っていた信仰は、良心の中で信じる信仰ではなく、知識的な信仰でした。神が生きておられ、聖書は神のことばであり、イエスは神の子として、私たちの罪を贖うために、十字架で死なれたことを認める知識の信仰でした。  

길기수 선교사와의 만남
길기수 선교사와의 만남
설교 준비를 하다 거듭난 대구 칠성동 집
설교 준비를 하다 거듭난 대구 칠성동 집
1961年11月18日 
ついに真理を発見する。 
なぜなら、律法を行うことによっては、だれひとり神の前に義と認められないからです。
律法によっては、かえって罪の意識が生じるのです。 
しかし、今は、律法とは別に、しかも律法と預言者によってあかしされて、神の義が示されました。
(ローマ人への手紙3章20節〜21節)



ある土曜日の朝、「義人は信仰によって生きる」というテーマで説教の準備をしている中に、一句節が目に入った。


律法を守って、人が神の前に義と認められるのではなく、イエスがわたしの代わりに、神の前に義と生きていたので、その義は、まさに私の義であり、信仰によってイエスの義が私のものになるということです。律法から解放されるということだ。


それでは、これから罪をむやみに犯しながら生きても構わないということなのか。そうではありません。律法が私を拘束しなくても、聖霊が導かれるので、むやみに放縦の生活をすることができないのが、まさに救いだということを悟りました。 


突然、心が平安になり、10年間良心を抑えつけた問題がなくなり、私が偽善者という考えも消え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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バプテスマを受ける 
苦難の始まり 

私は東村川の西にある木の下でギルギス宣教師にバプテスマを受けました。 そうした後、教会の長老を全員集めと言い、その前で私はバプテスマを受けたと伝えた。その時から様々な問題が起こり始めた。私が属していた長老教では、バプテスマを認めないからだ。 


そのことによって、私は1962年11月21日、大邱永楽教会で約4,500人の傍聴客が見守る中で、宗教裁判を受けるようになり、牧師職を免職されるようになる。


事実、その裁判はイエスを裁判することになる。イエスもヨハネにヨルダン川でバプテスマを受けましたが、イエスを従って、バプテスマを受けたのは、なぜ罪になるのでしょうか。 もともと生まれ変わる前に、偽善者として受けた牧師職だから免職されたのがむしろ荷物でも脱いだように胸がすっきりした。

数ヵ月後、私は赴任(ふにん)していた教会を出てきて、私について来た数十人の信者たちが、ある食堂2階に場所を用意し、私に続けて説教をしてくれることを要請した。わたしは「今から給料はもらわないです。」と宣言した。それでも信者の中には、米も持ってきてお金も持ってくることがあった。しかし、貧しくて生活ができなかった。  


ある時は、朝に米がなくてご飯を作れないし、家の中にある新聞や紙を集めて売って、豆腐を二丁買って、子供たちを食べさせて、やっと学校に送り、夫婦は一日中食べられなかった時もあった。平日には工場で仕事をし、週末には説教して、休む日なしで働いた。夏場、三伏の暑さに、風も通らないところで仕事をしたが、全身に汗もが出て、時には何にも食べられず、そのままに仕事をしたりした。 私がこの世に生まれて肉体的にそれほど苦労したことがなかった。  

1960년대
일반 교회의 부흥회 강사로 초빙되어 거듭남의 도를 전하다.

1960년대
일반 교회의 부흥회 강사로 초빙되어 거듭남의 도를 전하다.

모임 초창기에 나타난
방언의 은사

복성동에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저녁마다 모여서 성경을 읽는 모임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불량 청년들이 몰려와서 모임을 방해한 일이 있었다. 그들은 집회를 하고 있는 곳에 벌렁 드러누워 욕도 하고 행패를 부리는데 어린 신도 하나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방언을 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이 방해꾼들이 너무도 놀라서 도망치다 문지방에 이마를 부딪치기도 했다.

며칠 지나서 그 청년들이 찾아와서 벌벌 떨면서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았습니다"라고 했다. 그들은 결국 전도를 받고 구원을 받았다. 


방언이 일어나는 것은 성령이 역사하고 계신다는 증거이다. 고린도전서 12장을 보면 방언은 교회가 아직 성장하지 않았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교회가 어릴 때는 교회 자체로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증거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방언이라는 것을 통해서, 또 병을 고치는 등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확실하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한 일들이 우리 가운데 성령이 계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로 나타난 것이다. 그 이후로도 방언의 역사가 때때로 일어났으며 6년 후에 방언이 완전히 그쳤다. 교회가 성장하면 방언도 그치고 예언도 폐한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モイム初めに現れた方言の恩師

福城洞で多くの人々が救われて、毎夕に集まって聖書を読む会があった。ところが、ある日不良青年たちが群がってきて、集まりを妨害することがあった。彼らは集会をしているところに、すてんと横たわって、悪口もするし、ろうぜきを働くので、信徒一人が突然立ち上がって放言を始めた。その瞬間、この邪魔者たちが、あまりにも驚いて逃げる中に敷居に  額をぶつけたりもした。    

数日が経って、その青年たちが訪ねて、けちけちしながら「いま私たちはどう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か。神がおられたことを知りました」と言いました。彼らは、結局伝道を受けて救われた。


放言が起こるのは、聖霊が働いているという証拠である。コリント人への手紙十二章を見ると、放言は教会がまだ成長していないときに起こる現象だ。 教会が幼い時は、教会自体として神が共におられるということを証す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神が放言ということを通じて、また病気を直すなどの働きを通して、神の働きが確実であることを証するものである。  


その以後も、放言の歴史が時々起こり、6年後に放言が完全に止まった。教会が成長すると、放言も止まり、予言も廃止するということばが記録されている。 

1960년대, 일반 교회의 부흥회 강사로 초빙되어 거듭남의 도를 전하다.
1960년대, 일반 교회의 부흥회 강사로 초빙되어 거듭남의 도를 전하다.
극동 방송국 근무 시절
극동 방송국 근무 시절
1966年 極東放送局入社 
聴取者修養会による救いの歴史 

ある兄弟の提案で、1966年2月に極東放送局の放送牧師兼伝道課長として入社することになった。私は長老教から切れた人だったので、一般大衆を相手に伝道する道がなかったが、放送を通じて福音が家の奥の間まで入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った。

放送局では聴取者修養会という看板で、地方の伝道集会も活発に打って出た。修養会を重ねるごとに、出席人数と救われる数が倍に増えて、いっぺんに千余名ずつバプテスマを受けることに至った。その後には、放送局を共同で運営する契約を結ぶことになった。


극동 방송국 근무 시절

극동 방송국 근무 시절

1966년 극동방송국 입사
청취자 수양회를 통한
구원의 역사

어느 형제의 제안으로 1966년 2월에 극동방송국의 방송 목사 겸 전도 과장으로 입사하게 되었다. 나는 장로교에서 끊겨 나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일반 대중을 상대로 전도할 길이 없었는데 방송을 통하여 복음이 집집의 안방에까지 파고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방송국에서는 청취자 수양회라는 간판으로 지방 전도집회도 활발히 펼쳐나갔다. 수양회를 거듭할수록 참석인원과 구원받는 숫자가 배로 늘어났으며 한 번에 천여 명씩 침례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후에는 방송국을 공동으로 운영하는 계약을 맺게 되었다.

迫害の始まり 

聴取者修養会に出席して、救われる人々の中には、他の教団の教会に通っていた人々が多かった。その中には、平信徒ではない長老、執事など教会の重鎮もあった。彼らが救われて自分たちの教会に戻ると、決して静か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何らかの方法で同僚の教員に影響を与え、さらに自分の教会の牧師に「牧師は救われましたか?」と聞いたりもして、教会がうるさくなるなど、あちこちで問題が`起きた。    


結局、いくつかの長老教会で、教団本部に対策を立ててほしいという鎮静を提出することに至り、長老教会の本部は正式に極東放送局長に「権信賛牧師の信仰路線が異端」と問題を提起した。

当時、極東放送局を運営していたチーム宣教部は、韓国の最大の教団である長老教会から、聴取拒否運動及び関連書籍に対する不買運動を繰り広げるという圧迫を受けることになった。


1974年9月、放送局から私たち兄弟たち11人が解雇通知を受け、放送局共同運営契約も一方的に破棄された。  数ヶ月間、法廷闘争が続いて解雇無効仮処分決定など痛快な結果もあったが、事実上放送を利用した福音伝道はその日に終わったわけだった。 


しかし、この福音を伝えることは、その後にも続いた。

1970년대, 불광동 수양관에서 열린 극동방송 청취자 수양회
1970년대, 불광동 수양관에서 열린 극동방송 청취자 수양회

1970년대, 불광동 수양관에서 열린 극동방송 청취자 수양회

1970년대, 불광동 수양관에서 열린 극동방송 청취자 수양회

박해의 시작

청취자 수양회에 참석하여 구원을 받는 사람들 중에는 다른 교단의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는 평신도가 아닌 장로, 집사 등 교회의 중진들도 있었다. 그들이 구원을 받고 자기들 교회로 돌아가면 절대로 조용하지가 않았다. 어떤 방법으로든 동료 교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심지어 자기 교회의 목사에게 "목사님은 구원을 받으셨습니까?"라고 묻기도 해서 교회가 시끄러워지는 등 곳곳에서 문제가 일어났다.


결국 몇몇 장로교회에서 교단 본부로 대책을 세워달라는 진정을 제출하기에 이르렀고, 장로교회의 본부는 정식으로 극동방송국장에게 "권신찬 목사의 신앙노선이 이단"이라고 문제를 제기하였다.

당시 극동방송국을 운영하던 팀선교부는 한국의 가장 큰 교단인 장로교회로부터 청취 거부 운동 및 관련 서적에 대한 불매운동을 펼치겠다는 압박을 받게 되었다.


1974년 9월, 방송국으로부터 우리 형제들 11명이 해고 통보를 받았으며, 방송국 공동 운영 계약도 일방적으로 파기되었다. 몇 달 동안 법정투쟁이 계속되어 해고무효 가처분 결정 등 통쾌한 결과들도 있었지만, 사실상 방송을 이용한 복음전도는 그날로 끝난 셈이었다.


그러나 이 복음을 전하는 일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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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한국 하기수양회, 서울 올림픽 체조경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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